[강화이야기] 나의 답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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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답사론

홍순민(중세사 2분과)

요즈음 강화로 건너가는 다리는 둘이다. 하나는 한 30년 가까이 된 강화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100여 미터쯤 북쪽으로 새 다리를 놓는 공사를 하면서 공사용 차량이 다니기 위해 놓은 임시 다리이다.

원래의 강화대교를 건너 “역사의 현장, 호국의 성지” 강화도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갑곶 돈대가 있고, 그 옆에 강화 역사관이 있다. 군 단위에서 이런 규모의 역사관을 설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로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답사 인솔을 할 때면 거의 매번 이곳을 그냥 지나쳐 바로 강화읍으로 간다. 그 첫째 이유는 대개의 경우 먼저 강화읍에 가서 몇 곳을 둘러 보아야 점심 시간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강화에 둘러 볼 곳이 많으므로 이곳은 돌아 나올 때 시간이 되면 들르겠다고 미루기 때문이요, 그보다 더 큰 세째 이유는 굳이 이곳에 먼저 둘러서 어떠한 선입견이랄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인식을 강요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답사는 밟을 답(踏), 사실할 사(査), 곧 어떤 대상물을 현장에 가서 직접 살펴보는 것이다. 현장에 가서 그 땅을 밟아보는 것이 답사의 첫째 요건이요 생명이다. 사진, 비디오, 영화, 텔레비젼, 콤퓨터 통신 등 각종 시청각 매체가 발달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굳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어떤 지역,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실감나게 접할 수 있다. 기실 집에 앉아서 이런 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현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상세히, 더 짜임새 있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현장에 가지 않으면 답사가 아니다. 그 대상이 놓여 있는 현장에 가서 그곳의 지리적 위치, 주변 산수, 기후, 풍속, 사람들의 생김새와 말투, 인심, 음식 맛 등 자연과 인문 환경을 두루 피부로 느껴보는 것이 답사다.

답사의 둘째 요건은 내가 직접 살펴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간접 체험은 아무래도 직접 체험을 따라가지 못한다. 각종 매체를 통해 대상지역에 접하는 것은 내가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렌즈가, 그 렌즈를 들이대고 찍은 사람이 접한 것을 내가 얻어 보는 것이다. 현장에 가는 근본 목적은 직접 체험을 하기 위함이다. 답사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는 주체는 나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훌륭한 안내자의 말일지라도 그것은 내 느낌, 내 생각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 뿐, 내 느낌, 내 생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답사를 할 때는 그러므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한 태도를 취해야 할 대상은 안내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서 있는 안내판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써 있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안내문을 아무리 잘 쓴다 하더라도 길지 않은 분량에 그 대상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다. 설령 객관적인 사실은 다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여러 관점까지 모두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안내문을 쓴 사람의 관점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적지에서 흔히 보는 안내문들은 이러한 어쩔 수 없는 한계만 안고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성의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분명한 잘못, 명백한 오류가 상당히 많다. 우리 말로 된 안내문에서도 맞춤법과 문장이 틀린 예를 찾아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외국어로 된 안내문은 완전한 것이 드물다. 어떤 이는 ‘맞춤법이나 문장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고까지 극언을 할 정도이다.

백보 양보해서 맞춤법이나 문장이 틀린 것은 실수 내지 무성의라고 접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서술 내용에서도 명백한 잘못이 있는 것도 적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답답하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러한 안내문에다 머리를 박고 열심히 베끼고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참 아찔한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머리는 새 종이와 같다. 장난만 치는 것 같아도 마치 사진 찍듯이 빠르고 예민하게 받아 들인다. 그러한 머리에 한 번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그것을 고치기는 차라리 새로 가르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

잘못은 안내문에서 그치지 않는다. 답사의 대상이 되는 유물이나 유적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비일지재다.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안내문은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그 잘못을 고칠 수도 있다. 대개 사람들은 어떤 대상물을 볼 때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대상물 자체가 잘못되어 있을 경우 이를 판별해 낸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공신력있는 박물관 전시물 가운데도 진품들 틈에 모조품이 버젓이 끼어 있는 예가 있다. 전시물을 모두 진품으로만 구비하기가 어려우므로 모조품으로 대치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모조품이라고 밝혀야 함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어기고 모조품이라고 밝히지도 않은 채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없지 않으니 문제다. 심지어는 모조품이 아닌 위조품까지도 섞여 있다고 하니 어디 웬만한 안목이 아니고서야 이를 가려낼 수 있겠는가.

훌륭한 작품에는 그것을 만든 작가의 정신과 그 시대의 문화가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진품을 보면 감동이 온다. 그러나 가짜에는 그러한 정신과 문화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미약하다. 그것들에는 그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필요와 계산만이 승하다. 악의를 가지고 만든 위조품은 물론이거니와 전시장을 짜임새 있게 꾸미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 낸 모조 유물이나 복원된 유적 역시 진품이 아닌 가짜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가짜를 보고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 감동도 결국 진솔한 것은 될 수 없다. 이것이 진짜와 가짜를 굳이 가리는 까닭이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답사를 할 때는 이에 더하여 몇 가지 사항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유물이나 유적을 볼 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가 왜 저것을 만들었는가를 자꾸 물어 보아야 한다. 오래된 유물이나 유적에는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어 더욱 큰 울림을 받는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물이나 유적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다 보면 자연적으로, 때로는 역사적인 풍파에 의해 풍화 작용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색이 바래고, 모양이 마모되며, 때로는 깨어지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후대에 고치거나 혹은 다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크게 변화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재 시점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저것이 과연 본래 모습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중간에 변화한 부분은 없는가, 본래의 모습이 변형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을 품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보아서는 잘못된 인식을 갖기 십상이다.

답사에는 이런 긴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답사를 자주 하다 보면 심성이 너그러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언행이 시비조가 되기 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시비를 따지고 진위를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실을 캐낼 수 있고, 진실의 바탕 위에서 얻는 감동이라야 진솔한 감동이 될 수 있다. 강화 답사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