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ㆍ교동 답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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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근대 1분과)

지난 8월 4일부터 5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근대1분과에서 강화ㆍ교동답사를 다녀왔다.

강화역사관

답사 일행은 마포에서 출발하여 강화대교를 건너 먼저 강화역사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고인돌, 팔만대장경 등 대표적인 강화도의 유적ㆍ유물들을 전시되어있었다. 특히 제 3, 4 전시실은 대몽항쟁과 병인ㆍ신미양요 등 ‘강화의 전쟁사’를 주제로 꾸며 놓았는데, 층과 층 사이의 벽에 걸려있는 조선군함의 휘장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신미양요때 조선군함의 휘장으로 쓰였던 것으로 미군에 빼앗긴 것이었다고 한다. 또 전쟁에 사용된 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어 그 형태와 성능 등을 비교해 볼 수 도 있었다.

선원사지

팔만대장경의 판각장소로 알려진 선원사지는 현재 동국대 박물관 주도로 발굴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이 선원사지 터였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아직 부족한 듯 싶다.

여기가 선원사지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77년 동국대 총장 이선근이 주도한 동국대 강화도학술조사단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 국내외적인 위기에 처했던 박정희정권은 국난극복을 강조하면서 ‘총화단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이에 부합할 수 있는 유적지로 강화도를 주목하였다. 박정희의 지시로 개항 100주년이었던 1976년 8월부터 1977년 10월까지 ‘강화도 전사유적 보수정화사업’이 이루어졌고, 이때 정화사업의 학술조사를 동국대 강화도학술조사단이 담당했다. 선원사지 바로 옆 법당외벽의 선원사지 사적259호 지정을 기념하는 박정희와 이선근의 그림, 법당내부의 박정희와 육영수 사진은 이러한 사연을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 선원사지 법당외벽 그림. 그림아래 부분에 “1976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동국대학교총장 이선근박사가 이끄는 동대학술조사단에 의해

선원사지가 발견되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진 2) 선원사지 법당내부 박정희 육영수 사진

이로부터 선원사지는 고려시대의 유적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집권기를 보여주는 현대사의 유적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과도한 것일까? 현재 선원사지에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되었다는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또 지금의 선원사지가 선원사지가 아니라 가궐이었다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광성보

병인ㆍ신미양요때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로 향했다. 보는 중대병력규모의 군사가 주둔했던 군사시설인데, 여러개의 돈대와 포대가 있는 광성보는 1658년(효종9)에 만들어 졌다. 광성보의 성문 안해루 바로 옆에 있는 광성돈대는 평지에 낮은 담이 둥글게 쌓여져 있고, 그곳에 벙커와 비슷한 좁은 공간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진 3) 광성돈대

이어 신미양요에서 전사한 중군 어재연과 어재순을 기념하는 쌍충비각으로 갔다. 그곳에는 1873년에 세워진 ‘어재연 어재순 순절비’와 ‘광성파수순수비’가 있다. 쌍충비각 옆에는 나란히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또 세워져 있다. 정화사업이 끝난직후 강화도를 방문하여 쌍충비각을 본 박정희가 장군들의 순절비 옆에 무명장병들의 비도 세울 것을 지시하여 1978년 9월 무명용사비는 세워지게 되었다. 그것은 신미양요때 무명용사들이 총화단결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일게다. 지도자급의 ‘구체적인 인물’을 기념하는 방식과 ‘이름없는 용사’를 기념하고자 두 건축물은 전근대의 기억방식과 근대의 기억방식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는 듯 하다. 이같은 기억방식의 차이는 쌍충비각과 무명용사비의 외형에서도 느낄수 있었다.

사진 4)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왼쪽), 쌍충비각(오른쪽)

용두돈대 손돌목돈대는 병인 신미양요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해협이 갑자기 좁아져 병목현상을 일으켜 물살이 세지는 지형이다. 특히 손돌목돈대는 신미양요때 중군 어재연과 많은 조선군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 5) 용두돈대 인근 해협

용두돈대에는 박정희의 친필글씨가 새겨진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박정희가 정화사업 전체를 총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병인 신미양요의 치열한 접전지였던 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사진 6)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전등사 사고

1266년(원종7)에 중창되어 고려왕실의 원찰로 지원을 계속 받아왔다는 전등사에서는 전등사 대웅전 앞편 누각에 있는 기념품 상점내부의 벽에 이 절에 들렀던 관인이나 유명인사들의 친필문서들이 눈길을 먼저 끈다. 대웅전을 둘러본 후 전등사 사고로 올라가니, 사고에는 장사각과 선원각이 있고 주변에는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사고가 있었던 전등사의 최고 스님에게는 도총섭의 직책이 주어졌고, 1909년 사고장본을 서울로 옮긴후에도 전등사의 영향력은 강화뿐만 아니라 개성지역의 절까지 미쳤다고 한다. 전등사를 떠나 교동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사진 7) 전등사 장사각

화개사

교동 월선포 선착장에 내려서 읍내리지역의 화개산 중턱에 위치한 화개사로 갔다. 화개사는 전등사의 말사로서 고려때 창건되었고,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은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옛 정취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앞마당 정원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린다.

사진 8) 화개사

읍내리 석비군

1991년부터 읍내리의 유림과 이장이 교동내에 흩어져 있던 비들을 이전해 놓은 것으로, 대부분 선정비인데 총39개의 석비가 나란히 줄지어 늘어서 있는것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진 9) 읍내리 석비군

교동향교

1127년(인종5)에 화개산 북쪽기슭에 창건되어 1741년(영조17) 지부 조호신이 지금의 화개산 남쪽기슭으로 옮겼다는 교동향교는 최초로 공자상을 봉안한 곳이라 한다. 향교입구의 홍살문과 수령변장하마비를 지나니 교동향교 외삼문이 보인다. 그런데 향교관리자와 연락이 안되어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문틈으로 힐끗보기만하고 유도회 교동지부와 교동향교가 쓰여있는 현판만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다랠수밖에 없었다.

사진 10) 교동향교입구 홍살문과 수령변장하마비

사진 11) 교동향교

교동읍성, 교동부사지, 연산군적거지

교동읍성은 현재 남문의 홍예만이 남아 있는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졌다고 한다.

사진 12) 교동읍성 남문 홍예

1629년(인조7)년 경기수영을 교동현으로 옮겨 교동도호부로 승격된후 지어진 관아터이다. 누각기둥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기둥과 안쪽에 계단일부가 남아 있다.

사진 13) 교동부사지

연산군이 귀양생활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연산군잠저지’라고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었다.


사진 14) 연산군잠저지

 

삼도수군통어영지

삼도수군통어영의 훈련장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옛 선착장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의 월선포 선착장을 이용하기 전에는 이곳 남산포 선착장을 이용했다고 한데,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이 석모도의 일몰 이상이었다. 일몰을 바라 보면서 무더위속의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강화오상리 고인돌군

다음날 교동에서 강화도로 건너가서 첫번째 답사한 곳은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이었다. 예상보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정겹게 느껴지는 듯 하다.

사진 15) 강화오상리 고인돌군

연무당

연무당은 강화부 군사의 훈련장이었고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장소로 강화성 서문 부근에 위치해 있다. 연무당은 정화사업 초기단계에서 박정희가 방문했던 장소중에 하나이다. 연무당옛터비문 역시 박정희의 지시로 세워졌다.

사진 16) 연무당

사진 17) 강화성 서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연무당을 마지막으로 강화도답사를 마치고 해안도로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인천 상하이 요코하마 세 개항장을 중심으로 ‘도시기행’이란 주제하에 개관 60주년 기획전시를 하고 있었다. 세 도시의 조계석이 이번 특별전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듯 하다.

사진 18) 인천 각국조계석, 상해 공공조계석, 요코하마 거류지경계석(유리박스)

이영호 선생님의 안내로 박물관 기획전을 흥미있게 둘러본 뒤,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에서 색다른 늦은 점심을 하였다. 역시 답사의 묘미중의 하나는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독특한 메뉴의 새로운 음식을 맛보며 1박 2일의 답사일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