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林川澤 : 封禁과 與民共之 ③ 천택과 어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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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중세2분과)

9. 냇가(川畔), 온 백성 노니는 곳

일반 백성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시냇가의 무너미는 언제부터 온 백성이 노니는 곳이 되었을까?

15세기 후반인 성종 1년(1470)에 호조에서 “무릇 냇가[川畔]에는 모름지기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우거져야만 물을 막아 전답(田畓)을 지킬 수 있다[凡川畔 須有草樹茂密 可以捍水護田].”라는 보고를 국왕에 올렸다. 무너미의 땅이 널리 개간되면서 나타난 또 다른 문제였다.

무너미 땅이 애초 ‘자연제방’으로 쓰이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제방에 들어선 논과 밭이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제방으로 자연의 위력을 막아내지 못하는 곳이 많았던 탓이었다. 자연 제방를 튼튼히 하던 나무는 땔감으로 베어졌고, 인공 제방에 기대 개간된 냇가 논밭은 모래와 돌로 덮이기 일쑤였다.

15~16세기의 신문물인 천방(川防), 방천(防川), 보(洑)는 자연과 어우러져 절경이 되었고, 그곳에 세워진 정자와 온갖 나무들은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러기에 백성들의 볼거리가 되었고, 학문하는 이의 마음을 닦는 새로운 수양처가 되었다.

이러한 행렬에 국왕도 빠지지 않았다. 실록에는 세조 4년(1458)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새로 만든 논[新水田]과 방천(防川)을 구경하였다.

라고 하였다. 국왕인 세조가 친히 방천을 구경하였다는 것이다. 방천과 천방을 쌓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세조가 그 성과를 살피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세조는 7년 후인 세조 11년(1465)에 승지들에게

내가 내일 방천(防川)을 동교(東郊)에서 시험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내종친(內宗親)과 좌우(左右)로 나누어 감독(監督)하라.

라고 하였다. 방천은 국왕이 직접 시험할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후 전국 각처에서 방천과 천방을 통한 농지개간과 관개사업이 진행되었다.
냇가 물막이가 특별히 구경거리가 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독특한 시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종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은 의주 방천의 공사 방법을

강둑(江岸)에서 무너지는 곳에는 나무를 심고 돌을 메우고 흙을 쌓았습니다.

라고 했으며, 중종대 함경도 북병사는

입번(入番)한 군사들을 데리고 방천(防川)을 쌓되[修築], 버드나무를 줄지어 심고 그 밖에다 석축(石築)을 하였으며, 또한 큰 돌을 끌어다 두텁고 높게 쌓았다.

라고 하였다. 흙으로 쌓여진 둑에 물이 닿는 곳으로 석축을 하고, 둑에는 버드나무 등 물가에서 잘 자라는 나무를 줄지어 심어 흐르는 냇물에 흙이 씻겨 내려가지 않게 만들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볼거리가 되었다. 16세기 중엽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된 이문건도 틈틈이 성주성 밖에 쌓여진 천방(川防)과 그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

유배된 직후인 명종 1년(1546) 봄 『묵재일기(默齋日記)』에 이문건은

날이 저물고 천방(川防)을 보러 나갔는데, 달빛을 타고 걸어서 백화헌(百花軒)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매화를 감상하는데, 어린 나무는 처음 꽃을 피웠고, 늙은 나무는 이제 한창 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매화 나무) 가지에 기대어 향에 취했다. 달빛이 밝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잠시 후 판관[二城主]의 소리가 들리더니 갑작스레 다가와 만났다. 함께 앉아서 매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가져와 조금 마셨다. 깊은 밤에 헤어져 돌아왔다.(1546. 2. 9)

라고 적었다.

 

IMG_4670

DSC09249-058[그림 1] 천방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을 매화와 정자, 아래는 퇴계의 제자 금난수가 지은 예안 부포의 고산정( http://cafe.daum.net/boasboas/Bsf0/53716?q=%B8%C5%C8%AD%B3%AA%B9%AB&re=1, http://blog.daum.net/snowmiru/1337)

예안으로 물러나 퇴계라 스스로 이름하던 시절의 이황은 종종 이문건에게 서찰을 보내 교유하곤 하였다. 퇴계가 머물던 온혜야말로 15세기 중엽 이래 온계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가를 개간하여 1500여 마지기의 전답을 마련한 곳이었고, 덕분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던 지방의 유력한 사족이 될 수 있었다. 퇴계의 시를 보자.

매화나무

산창에 홀로 기대서니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
산들바람 일부러 청하지 않아도
맑은 향기 뜨락에 가득

뜨락을 거니니 달은 나를 따르고
매화 꽃 둘레 몇 번이나 돌고 돌아
밤 깊도록 일어나길 잊었더니
옷엔 향기 가득 몸엔 그림자 가득

임금을 떠나온 이의 사모의 마음이겠지만, 냇가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들의 동변상련이기도 하였다.
실제 성주성의 동문 밖의 천방에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성주 성 동문 밖에 있던 천방 주변은 유배인이었던 이문건 뿐 아니라, 성주목의 주요 인사들도 좋은 풍경을 즐기며, 술도 나누며 교유하는 공간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나길 간절히 소망하였지만, 끝내 해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이문건은 대부분의 시간을 성주 읍성 근처를 맴돌며 지내야 했다. 지루함을 달래려 산책을 다녀온 이문건은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나섰다 천방을 따라 갔다. 봄 풍경을 감상하면서 동문 밖에 도착하여 홰나무에 기대 냇물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보내 물어보니 지생(池生) 등이 목사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하였다. 성 아래로 돌아가서 방에 누워 쉬었다(1561. 3. 27)

라고 일기에 적었다. 천방은 이문건의 주요 산책 코스였고, 봄의 풍치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성주 읍성 동문 밖 천방 인근은 성주 사람들에게 휴식과 교류의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뛰놀고 말과 같은 가축이 병들었을 때 바람을 쏘이며, 풀을 뜯기는 곳이기도 했다. 막기에 좋은 좁은 물길은 경치가 좋았고, 경치가 좋은 곳에 선비들은 마음의 수행처로 정자가 세워졌다.

 

10. 천렵(川獵), 즐기고 살지리라.

호랑이가 사라진 무너미의 땅이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자, 들판에서 하던 사냥은 시냇물에서 하는 사냥으로 이어졌다. 천렵이 바로 시냇물에서 하는 물고기 사냥이었다. 물고기 사냥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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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조선시대 풍속화 속의 천렵, 김득신의 <천렵도> (좌: 간송미술관 소장, 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무명자 윤기(尹愭, 1741~1826)는 천렵을 바라보며

천렵을 구경하며 :: 觀川獵

징검다리에 그물 치고 돌 던져 물 일렁 :: 織薄承梁石打波
아이들 다투어 좇으니 물고기 떼 지나가 :: 群兒爭趁衆魚過
문득 대나무 통 가득 채우고선 팔딱팔딱 :: 須臾潑潑盈筠裏
이번 잡은 게 제일 많다 웃으며 시끌벅적 :: 笑道今番得最多

라고 노래했다.

냇가에서 물고기 잡으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기 그지없다. 냇가에서 하는 사냥이라 하여 ‘천렵(川獵)’이라 부른 물고기 잡이는 단순히 물고기 잡이에만 그치지는 않았다. ‘산행(山行)’이나 ‘산렵(山獵)’과 마찬가지로 천렵에서 얻은 물고기를 맛난 요리로 만들어 즐기는 연회가 이어졌다. 천렵의 유행은 사람들이 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고, 방천으로 깊어진 물이 많아지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일상의 놀이가 되었다.

먼저 방천(防川)이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일상적 단어가 된 것은 그 사업이 본격화한 15~16세기부터였다. 지방의 수령과 사족이 주도하던 천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린 아이들도 즐기는 놀이로 대중화되었다.

물고기가 모이는 천방이나 방천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중적 시설로 변모하였고, 이는 언어의 세계에 각인되었다. 조강에서 성세창(成世昌)은 임금에게 “옛말에 백성의 입 막기를 방천(防川)보다 두텁게 한다[古曰 防民之口 甚於防川].”라고 하였고, 홍문관에서 올린 차자에 “삼사(三司)에서 발론된 공론(公論)은 마치 방천(防川)이 터진 것과 같아서 진실로 막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라는 말이 쓰인 것은 이러한 좋은 사례이다.

곳곳에 물을 가두는 천방이 생김에 따라 이곳에 모인 물고기를 잡고 즐기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종 11년(1516)에 지방의 수령들이

제언(堤堰)·천방(川防)은 예부터 해 온 것인데,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에 수령(守令)과 백성이 혹 고기잡이를 하느라고 물을 터서 제방(隄防)을 거의 다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라고, 세 정승들이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산렵(山獵)’이 성행하는 지역으로 언급된 고을은 의주, 정주, 인산, 철산, 곽산, 수천, 선천, 정녕, 삭주, 창성, 벽동, 영산, 태천, 이산, 여연 등 15개 가량인데, 이는 밭농사가 발달한 평안도 지역이었다. 이러한 산렵과 달리 천렵은 천방이 발달한 하삼도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16세기 초인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하였던 음애 이자(李耔, 1480~1533)는 용인의 두암(斗巖)으로 불리는 곳에서 천렵을 즐겼고, 16세기 중엽 퇴계의 제자였던 안동 유생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역시 주변의 냇가를 찾아 천렵을 즐기다 날이 저물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왜란 직후 20대였던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 역시 천렵을 즐겼다. ‘洞內諸親’이라 불리는 예안 오천 군자 마을에 살던 몇몇 친군들과 틈이 나면 枕流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천렵을 즐겼다. 김광계의 손자인 김순의(金純義, 1645-1714) 역시 천렵을 즐겼는데, 이들은 천방이 설치된 곳에서 냇가의 물고기를 잡았고, 벗들과 회(膾)를 나누며 즐겼다.

예안에 머물던 김령이 남긴 溪巖日錄에도 천렵의 생생한 모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천렵의 참여자들이 서당의 학동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실 서당(而實書堂)의 교관과 아이들 16~17명은 틈틈이 냇가를 찾아 천렵을 즐겼던 것이다.

19세기 초 부산의 기장으로 유배되었던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혹은 아이들을 보내 그물로 물고기를 잡게 했다. 천렵에서 붕어(鮒魚)는 거의 매번 커다란 바리때로 하나 가득씩 잡았으며, 간혹 은어가 잡히기도 했다. 붕어는 삶아서[烹] 저녁 반찬이나 국[羹]으로 만들어 먹었으며, 소금 절인 은어는 오래두고 입맛 돋우는 밑반찬으로 삼았다.

천방은 논밭에 물을 대주어 백성에게 많은 곡식을 안겨주었고, 고인 물에서 자란 많은 물고기로 백성이 즐기고 살찔 수 있게 하였다. 그러기에 천방이야말로 조선의 탁월하게 즐거운 발명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