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문화사』(휴머니스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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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문화사』
(2007, 휴머니스트)

 손병규(중세사 2분과)

  이 책은 전적으로 경상도단성현호적대장을 전산화한 덕택에 구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덕택’이라기보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심정에서 글을 썼다.

  단성호적 전산화는 1998년부터 한국역사연구회의 사회경제사 연구팀에 의해 시작되었고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지속되어 2006년도에 마감되었다. 호적을 전산화하여 매를 맞는 신세가 된 것은 전산화를 시작할 때 각자 공동작업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예상되었던 일이다.

  호적이 전산화되기 전에는 개별 연구자들이 엄청난 시간과 정열을 쏟아야만 약간의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한 호 한 호를 일일이 세어가며 필요로 하는 요소를 집계하는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존의 호적 연구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전산화를 하면서 더욱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호적을 전산화한다면 집계의 신속함은 물론이요 호적기록의 전체상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호적자료가 가지고 있는 학술적 가치는 엄청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처음에 그것을 전산화하고자 했을 때에는 모두가 망설였다.

  나는 ‘조선후기 지방재정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여기서 군역 및 요역의 징수, 그 지역적인 배분 원리를 알기 위해서 단성현호적대장 두 식년의 호구를 집계하였다. 재정사적인 관점에서 호적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호적 전산화를 시작한 한국역사연구회 연구팀 가운데 그나마 호적을 다루어본 소수의 인물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 사회경제사를 연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질 뿐, 대부분 호적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었다. 내 입장에서 호적전산화의 정당성을 설파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적을 전산화하면서 다행히도 거의 모두가 호적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호적은 자유롭게 서술된 자료가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기록되어 통계적 처리가 가능한 계량자료라 할 수 있다. 호적을 전산화하기 위해서는 기록된 모든 요소에 대해 형식에 따른 항목을 설정하고 어느 항목에 관한 기록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항목을 설정하고 전산입력하는 것 자체가 연구였다.

  따라서 호적을 전산화하면서 제시된 초기의 연구들은 ‘호적의 자료적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전산화 결과물을 가지고 무언가 기존의 연구와 다른 측면에서 바로 접근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기록물이 작성되는 의도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통계적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호적을 전산화하여 호적연구자들에게 제공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산화 자체가 연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며, 전산화된 이후에도 호적연구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계속해서 요구되었다. 그렇게 법석을 떨었으면 뭔가 대단한 연구가 쏟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렸다.

  호구기록을 사회과학적으로 가공하지 않고는 실제의 사회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호적자료의 제한적인 성격만이 강조되어 왔는데, 그래서는 호적연구가 활성화되기 어렵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호적전산화를 수행해온 연구자들은 이제 호적자료의 의도성, 연구상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실제의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방안을 찾는 단계에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단성호적대장 전산데이터 한자판이 나오기 전, 2003년 12월에 일단 한글판으로 전산데이터가 공개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호적의 자료적 성격을 재검토한 연구들을 묶어서 《단성호적대장연구》라는 단행본을 내게 되었다.

  이후 줄곧 호적연구자들은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창출하라는 추궁을 받아온 셈이다. ‘호적’ 책자를 출간하게 된 것이 매를 맞는 심정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문화사》는 호적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도입부분을 빼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을 ‘조선의 주민등록’ ‘호적의 직역’ ‘호적의 변화와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서 호적을 통한 새로운 연구방법론은 여성사와 가족사에 대한 문제제기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첫부분과 마지막부분에 각각 서술하였으며 전체가 두 가지 문제로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이 책이 지금까지의 본인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냐고 묻는다. 기왕의 본인 연구에서 끌어온 것은 많지 않다. 그것도 상기의 문제제기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연구도 인용했다. 그 외에 대부분은 새롭게 쓰여졌다.

  호적연구를 군역으로부터 시작한 관계로 나는 특히 ‘직역’에 주목하여 연구해왔다. 기존의 호적연구는 주로 직역을 사회계층으로 분류하여 신분제와 사회구조의 변동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신분은 관직이나 의무사항을 나타내는 직역을 부과하고 양인·노비를 가르는 데에 머물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평민-천민과 같은 단선적인 신분 구분은 제도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단지 일정 지역 내에서 사회적으로 그렇게 인정될 뿐이다.

  기존의 연구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는 국가적 신분과 사회적 신분이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국가적이든 사회적이든 신분 사이의 이동이 가능하여 ‘신분은 존재하되 유동적’이라는 데에 조선사회 신분의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는 호적상에 신분의 유동성을 용인하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유동성 때문에 끝까지 신분제를 고수하였다. 그것은 신분적 결집이나 차별을 약화시켜 모든 인민을 왕권하에 균등하게 파악하려는 통치이념에 근접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중하층 인민은 국가문서인 호적을 통하여 양반지향적인 경향을 표현하였으며, 기왕의 양반들은 그러한 현상에 대응하여 그들과 구분되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족보의 편찬과 문중의 형성, 그리고 가족의 지속적 계승이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가 인민을 어떻게 장악하려 하는가’ ‘국가적인 파악에 대해 인민은 어떻게 대응해 가는가’라는 원론적인 두 가지 관점에서 가족사을 바라보는 계기를 주었다. 국가와 인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사회집단이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전근대사회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특히 최소의 사회집단인 가족의 유대관계와 형태, 그 방향성이 신분제의 특성은 물론이요, 사회경제적 위상과 관련하여 그 특징을 드러낼 것으로 여겨진다.

  동아시아사회는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오래전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족사는 서구와 다른 이 지역 역사의 특징을 바라보는 수단으로 여전히 유용하다.

  한 호에 등재된 가족구성을 동거하면서 경제생활을 함께하는 현실적인 가족형태라고 인식되곤 했다. 또한 호적과는 별도로 가족의 규모 및 형태가 전근대사회의 대가족에서 근대사회의 소가족으로 변화해왔다고 인식되어왔다.

  분명 조선시대 호적은 현주소로 가족구성원을 등재하는 주민등록으로 거주와 상관없이 민법상의 가족을 본적지로 파악하는 일제하 이후의 호적과 다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국가적인 목적에 따라 파악된 가족일 뿐, 그것을 바로 현실의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현실의 가족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여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가족구성원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분화되거나 합체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는 있다.

  호적의 호를 구성하는 가족은 부부와 미혼자식을 기본 형태로 한다. 먼저 혼인하는 장남부터 부모의 호로부터 분호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드시 그러한 가족범위로 호가 구성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체로 원칙을 따르는 편이다.

  한 연구자는 호의 가족구성을 살펴보고 조선시대에는 막내가 끝까지 부모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은 적이 있다. 호적 기록상으로는 형들이 모두 분호를 했으니 당연할 결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들은 부모의 호 바로 옆에 호를 세우고 있다. 장남부부는 사실상 부모를 모시면서 동거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식들에게 골고루 재산을 나누어주는 상속관례는 모든 자식들이 혼인하여 가족을 형성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재산 및 가족구성원의 분할로 말미암아 가족의 경제력이 약화되고 가족이 붕괴될 위험도 커져간다. 이에 대응하여 발생한 장자우대적인 상속은 가족의 경제력과 규모를 어느 정도로 유지시킨다.

  그러나 차남 이하의 형제들이 가족을 형성하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 양자의 설정은 재산의 공중분해를 막고 가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유행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를 통하여 평균적인 가족규모는 근대사회에 접근해 갈수록 커질 가능성도 있다.

  가족사 연구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여성사 연구의 측면에서 촉발되었다. 호적에는  ‘부, 조, 증조, 외조’의 ‘사조(四祖)’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부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양식으로 기재된다. 사조라는 계보 자체도 부계만이 아니라 ‘외조’라는 모계를 포함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남성의 가족과 여성의 가족이 동등한 위상에서 맺어진 혼인관계의 결과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 이후에도 지속됨을 보여준다.

  시집온 여성은 별도의 성을 가짐으로써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듯 보이지만 반대로 가족 내부에 자아를 유지함으로써 실제로는 가족을 주도할 힘을 축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종법질서을 강조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유동적인 신분과 변화하는 가족 가운데 뚜렷한 기준점으로 존재했다. 조선시대 여성은 자식들의 신분을 결정하고 남편의 신분에 영향을 끼치는 최대의 요인이었다.

  여성은 그렇게 형성된 가족을 사회경제적으로 주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가족의 대표로서 나설 수 있었다. 조선시대 여성이 현실적으로든 법제적으로든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가족을 존중하는 혼인관계에 있다.

  호적에 대한 연구는 직역에서 시작하였으나 책의 서술은 여성문제부터 언급하여 직역·신분을 넘어서 가족에 대한 문제제기로 매듭지었다. 여성문제부터 언급한 것은 현재에 유행하는 여성사 혹은 생활사에서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론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여성은 차별받고 억압받아 그 존재 자체도 어둠속에 가려져 있어야 했다. 중세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를 밝히고자 하는 초기의 여성생활사연구도 남성에 종속된 부차적인 조선시대 여성상을 확인할 뿐이었다.

  현재 여성사는 사회적 성의 역할분담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이 국가로부터 어떻게 규정받는가라는 문제를 포함하여 다시 국가와 여성과의 관계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책은 결코 호적연구를 집대성한 것이 아니다. 호적으로부터 이러한 측면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 없는 시도이다. 그 가운데 운 좋게도 사회사 연구분야에 문제제기가 될만한 꺼리가 있다면 하고 바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호적연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책의 부제에 ‘호구기록으로 보는 조선문화사’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문화사라기보다 사회사이다. 그러나 앞으로 지향하는 바를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