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상인』(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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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
『제국과 상인』(2007, 역사비평사)

이승렬(근대사분과)

20세기가 얼마남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식민지 시기 조선상업은행의 중역회의록을 포함하여 여러 문서를 볼 기회가 있었다. 시간이 다소 흘렀지만 자료 분석에 대한 적절한 방법론을 찾지 못했던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초조했지만 자료에 노출되어 있는 문자들을 국가 – 자본 – 시장 – 사회 네 변수를 위에서 보려는 생각을 계속했다.

  누가 ‘궁하면 통한다.’라고 했는가? 어느 날 갑자기 조선상업은행의 경영진 및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한인 자본가들을 조사하면 무엇인가 정리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진태 및 백완혁 같은 인물들의 활동은 이미 한말부터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들의 ‘친일’ 경력 때문에 그동안 그들은 근대사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의 한말 활동과 일제시기의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은행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열람한 한말 대한천일은행의 자료들은 예상한 대로 한말 상인들이 중앙정부 및 관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위시하여 상인들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자료들은 은행과 대한제국 정부 사이의 거래, 은행과 상인들의 거래를 상세하게 보여주었고, 또 불완전하지만 상인들의 이력도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조세청부에 시전상인을 위시하여 어떤 상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지에 관한 정보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대출을 위시하여 은행을 들락거렸던 돈의 흐름을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 중에서 국가와 상인의 관계는 가장 주요 이슈였다.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에 참여했던 서울과 그 주변의 상인들을 바라보면서 이 문제는 조선왕조의 구조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세국가이며 중앙집권적인 조선왕조는 겉으로는 상업을 말업으로 천시하고 있지만 그 속성상 국가의 유지를 위해 상인세력과 상호 공생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또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서울은 중국으로 사행사절이 떠나는 시발지이자 종착지로서 서울은 해외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조공무역의 중심지였고, 미곡을 위시한 각종 상품들이 모여드는 국내 상업의 거점으로서, 상품과 사람의 교류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해외 무역과 국내 무역의 중심지인 서울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식과 문물의 통로가 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한 상업적 부를 누리고 해외에서 유입되는 선진 지식을 남보다 앞서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19세기 세도정권기에 서울과 그 주변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한 경화사족들이었다. 농업보다는 상공업을 장려하고 조선왕조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북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태내에서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국내외 교역과 경제적 부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최신 정보가 전해지는 장소가 바로 서울이었고,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흐름과 그것을 변혁하려는 흐름이 공존하고 대립하는 양면성을 지닌 곳이 또한 서울이었다. 따라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주의 충격에 대응하는 개화파 및 광무개혁 주도세력이 형성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분권적 사회였던 일본과 집권적 사회였던 조선의 차이는 이 책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에 주요 단서였다).

이 책은 바로 서울이 갖고 있는 장소성과 개혁운동의 관계, 특히 상인세력과 광무정권이 만들어 낸 한국 근대 이행의 구체적인 모습에 주목하였다. 혹자의 지적대로 대한제국은 다수의 민중을 수탈했고 전제왕권을 강화했다. 이것은 광무정권의 부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의 모습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정치세력을 등용하고 기존의 정치세력을 견제하는 가운데 여러 개혁들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 상인들이 참여하여 근대적 은행가 및 기업가로 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일본, 러시아를 위시하여 여러 열강들의 견제를 받았고, 국내에서도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했다. 화폐개혁을 위시하여 근대화 프로젝트를 위해 대한제국이 도입하려고 했던 프랑스 차관이 일본 및 영국을 위시한 외세에 의해 좌절된 것은 대한제국이 운신할 수 있었던 폭이 얼마나 작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대한제국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금융근대화 같은 여러 개혁 사업을 추진했다.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대한제국의 한계이지만 전제황권을 축으로 하여 상인 및 관료 세력이 공생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근대적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것은 대한제국이 보여주었던 한국근대 이행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이면서 은행가 및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가로 전환한 자본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이미 17세기 이래 서울 및 그 주변의 상인들과 왕실을 포함한 양반관료들 사이에 형성된 관상유착 – 상호 공생적 관계의 전통 위에서 성장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근대적 이념의 주체가 되지는 못했지만, 국가가 근대를 향해 움직일 때 그 흐름에 현실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세력이었다.

  국가에 의존적 이었던 그들은 새로운 통치자인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식민지시기 내내 돈 많고 대접받는 지위에 있지만 도덕적 이념적 리더쉽이 결여된 부르주아로 존재했다. 한국 부르주아 1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식민지 당국과 자본가의 협조 관계의 초석을 닦아 놓았다.

  1920년대에 김성수를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2세대가 등장하여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적 헤게모니를 추구하였다. 이들은 1세대에 비교하여 정치적 이념적으로 적극적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패권적 부르주아의 모습을 지녔지만, 그들 역시 1930년대에 들어가면서 1세대가 만들어 논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책이 『제국과 상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한국의 상인들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서 근대적 사회세력으로 전환한 점을 고려했기 때문인데, 이 점은 한국 근대를 이해할 때 항상 의식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아가 우리는 대한제국의 양면성을 위시하여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열강들의 세계전략 등 다면적 차원에서 한국근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새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국 부르주아의 사회적 헤게모니가 상실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과정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걸쳐 서울의 장소성을 기반으로 진행된 한국 근대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