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 – 무엇보다, 이야기가 하고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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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하고 싶었지요
-다시 역사적 유물론으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


오항녕(중세2분과)


<그림 1>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


역사학은 관점이 아닌 사실의 학문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그게 싫었습니다. 원래 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무슨 역사학자가 옛날 얘기나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귀여운 자부심?! 지금 보니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는 분들이 맞았습니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처음 그걸 시도했습니다.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폴 벤느)

  이번에 낸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은 광해군 전후의 시대사입니다. 흔히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보기 나름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러나 진정한 역사공부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史實)은 늘 구멍이 뚫려 있고, 사람의 눈은 다르다는 그 지점에서 말입니다.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상황을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나가는 지루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숭고한 여정, 그것이 역사공부입니다. 그래서 역사공부는 연대의 삶, 공감의 삶, 배려의 삶을 확장시키는 토대라고 굳게 믿습니다.

같은 점과 다른 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속고 왜곡할 수 있을까? 처음 제가 광해군대를 심각하게 공부하면서 가졌던 격한 소회였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전 민족적으로 씌워지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백주대낮에 이 땅에서 버젓이, 교과서, 텔레비전, 논문, 저서, 칼럼, 수필을 가리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홀리고 있었습니다. 혹세무민! 이 말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3년 전 연구노트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을 쓸 때의 일입니다.

“내가 이렇게 광해군의 외교를 혹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광해군 재평가의 선두주자였던 이나바는 광해군을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린[澤民]’의 군주라고 불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나바는 광해군대 국내 정치를 거의 도외시했다. 제대로 『광해군일기』에 나온 국정의 난맥상을 읽었다면, ‘택민’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최근의 연구자인 한명기는, “이나바 이래 광해군의 이른바 ‘중립외교’가 지니는 긍정적 측면만을 지적하는 데 매몰되어 궁극적으로 그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측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2000년의 저서인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다시 이나바의 문제틀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당초 사대주의 등 대외정책에 대한 인식틀에서 보면 한명기가 이나바의 프레임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압도당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이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을 강조하려다보니 균형 감각을 상실했고, 그 균형 감각의 상실이 내치와 외교의 연관성에 대한 관찰을 놓쳤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저서에 동원한 자료나 저자의 문장에 비추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사라진 ‘내치와 외교’의 연관을 다시 살펴보고, 단순히 이것은 잘했고 이것은 못했다는 식으로 늘어놓는 재평가 말고, 제대로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평가해보자.”

그래서 북인(北人)의 학풍에 대한 몰개념적 인식, 대동법 시행 과정과 주체에 대한 왜곡, 궁궐공사 규모와 영향의 축소, 대외관계 인식의 결과론과 패배주의, 식민주의 프레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왜곡의 전면적인 내면화(內面化)를 지적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의 힘》 6장 ‘부활하는 광해군’에 실려 있습니다.

역사학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

여기에는 근대 역사학의 깊은 콤플렉스, 과학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른바 ‘과학적 역사학’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그 콤플렉스는 사회경제사학의 학문적 기여와 민주주의적 지향에 의해 은폐되어 왔습니다. 동시에 스탈린주의에 의해 오염된 역사적 합법칙성의 교조주의도 은폐해왔습니다. 아래는 이번 《광해군》에 쓴 프롤로그의 일부입니다.

“광해군이 부활한 토양은 근대 역사학의 근대주의이다.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근대가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로 설정되는 것, 그것이 근대주의이다.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의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로스토우식 경제발전 5단계설이나, 스탈린시대 속류 맑시즘의 역사발전단계설 및 역사 합법칙설 모두 이런 근대주의의 변형들이다. 이런 류의 사유방식, 이를 나는 근대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이전 시대와 위계를 설정하는 진보 관념이 자리를 잡는다. 그 진보 관념은 막강한 과학의 힘과 생산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근대주의 역사학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로스토우식 발전사관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 합리화 수준의 전자와는 달리, 역사적 유물론, 사회경제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정치사, 그중에서도 뛰어난 개인이나 국왕을 중심으로 서술하던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에서 사회구조나 형태로 눈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진전을 가져왔다. 경제사나 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 그 예이다. 그러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을 주로 영웅이나 초월적 존재 또는 우연에만 맡겨버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사람들, 곧 농민, 민중을 포착하게 되었고, 노동, 여성, 제3세계 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사 연구에서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회와 경제구조, 농민의 운동, 변혁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학 발전의 징표였다. 역사학은 20세기 후반기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성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역사학이 그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사 연구는 곧 역사의 이행(移行)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더구나 덤덤한 이행도 아니라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아픈 이행’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조선은 식민지로 연결되었고, 그에 따라 ‘변명’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또는 필연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든지, 식민지가 아니라 자생적인 근대로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식민사관이라면 후자는 민족사관 등 이른바 식민사관을 극복하겠다고 생각한 입장을 대변한다. 다음 표를 보자.

식민사관

식민사관 비판

비판의 프레임

타율성론

내재적 발전론

진보사관

정체성론

자본주의 맹아론

자본주의축적

성리학 공리공담론

실학

계몽주의

사대론

민족주의론

국민국가론

당쟁론

붕당론

정당론

<표 1> 식민사관과 식민사관 비판 도식

무엇이 보이는가? 식민사관 비판의 프레임이 우리가 배워온 근대, 즉 서유럽의 근대 모델이었다. 진보사관은 본산인 서유럽에서도 막을 내린 지 오래고, 일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조선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의 근거로 제시했던 경영형 부농의 존재 등은 설득력을 잃었다. 성리학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 출발한 실학은 아직도 개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사대론을 부정하려고 민족주의론을 들고 나왔지만 사대라는 동아시아 외교방식은 엄존했기에 부정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정치계에서 붕당은 부정적 존재였다.

결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은 미흡했다. 아니, 애당초 저 논리로는 불가능했다. 첫째 이유는 식민사관을 비판했던 논거와 담론이 식민사관의 연장인 서유럽 제국주의 프레임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되지 않았던 데 있다. 둘째, 식민사관 비판의 실증적 근거나 프레임이 되었던 담론 자체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부실한 논리와 오류투성이 사실들이 권력을 가졌는가? 그것은 그 담론이 딛고 있던 물질적 토대, 즉 근대 과학(의학)과 자본주의 생산력 때문이었다. 압도감! 그것이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덮어씌우기의 오류이다. 상이한 삶의 양식과 구조가 작동하던 조선 사회를 아예 서유럽 근대 모델로 포맷한 것이다. 아니 포맷하려고 한 것이다. 다행히 과거는 포맷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역사학은 방심했다. 역사학 본연의 문제로부터.

“역사학의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A사회와 B사회는 어떻게, 왜 다른가. 둘째, A사회는 A’사회로 갔는데, 왜 B사회는 A’사회로 가지 않는가”(에릭 홉스봄)

역사를 설명하는 세 가지 방법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이제는 광해군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유령을 드러내기 위해 담론이 딛고 있는 현실을 파보았던 셈입니다. 함께 공부하는 분들의 도움으로 제 삽은 예리해졌고, 제 곡괭이에는 힘이 실렸습니다. 그리하여 제 속에 광해군이 들어오고 이원익, 이항복이 들어왔습니다. 이이첨, 정인홍이 들어왔고, 무엇보다 농사짓고 남은 것조차 세금으로 빼앗기고 떠돌다 죽어간 사람들, 인경궁에서 돌을 쪼던 장인들, 심하 전투로 끌려가던 병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딛고 일어나는 그들이 보였습니다. 그 삶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준비한 유령의 모습 1편을 보여드리고 싶었지요. 2편, 3편 계속 준비할 생각입니다. 여전히 《광해군》에서 생각했던 역사를 설명하는 세 가지가 유효합니다.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타고 나면서 주어진 조건이 있다. 벗어나기 어렵다. 왕이라는 것, 학자라는 것, 농민이라는 것……. 때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것, 협잡꾼 집안이라는 것, 이도저도 아닌 집안이라는 것……. 충청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얼굴이 누렇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조건 등. 이들은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건대로 살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아파트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하고, 헌신으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하고, 공부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한다.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함에도 환원론(還元論)의 우려가 있다. 경제결정론, 지리결정론, 환경결정론이 그것이다. 객관적 조건만 고려하면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없다.

객관적 조건의 맞은편에 의지를 강조하는 목적론(目的論)이 있다. 그 극단에 신(神)이 있다. 이런 관념론적 목적론은 흥미롭게도 속류 유물론의 목적론과 통한다.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도덕적 요청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태를 설명할 때 빈곤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해군 시대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 그리고 사건들의 우연성을 살펴보고 싶었다. 시스템의 작동은 문치주의와 재정의 측면에서 경연, 사관, 부세제도인 대동법을 잡았다. 외교를 살펴본 대목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으나 이번 연구에서 큰 비중은 없다.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은 정치세력의 교체, 수차례의 옥사, 궁궐공사를 대상으로 했다. 사건의 인과성보다는 우연이 포함된 상관성을 찾아보았다. 그래야 설명도 가능하고 책임도 물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도 긴장할 수 있고 아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마르크스로

지난 여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김호균 옮김, 그린비) 세 권과 씨름했습니다. 홉스봄은 이 책이 역사적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장 성숙한 생각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홉스봄은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경제적 역사 해석’은 “경제적 요소는 근본 요소로서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에 종속된다”는 신념이다.

(2)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모델은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지배와 의존이라는 단순한 관계로 해석되어 왔다.(이게 아니라, 상이한 수준이라는 것!) 이 관계는 대부분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에 의해 매개되었다.

(3)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 사람들은 수많은 속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공산당선언》의 첫 쪽에 나오는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서술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첫 문장 이상을 읽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여기 이 말, 죽이지요? ^^)

(4) ‘역사법칙과 역사적 필연성’. 인간사회가 역사 속에서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했다고 마르크스를 보는 것. 그래서 장기적인 운동에 대한 일반화의 수준에서 우연적인 것은 이러한 발전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개인이나 우연의 역할에 대한 선입견. 기계적 결정론.

스탈린은 마르크스의 역사학을 철저히 속류화시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거기서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중원문화) 서문에 나오는 그 도식, 원시공산제→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단 한 줄짜리 도식을 절대화합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수고본(手稿本)으로 마르크스 당시에 간행되지 않았으며, 1857~58년에 작성된 노트입니다. 스탈린시대에도 간행되지 않았다가, 대략 1950년대에 알려지고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는 1859년에 간행된 책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번 여름 《요강》 세미나 덕분에, 홉스봄 해제, 성낙선 옮김,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1978?)(1988, 지평)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텐데, 바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라는 수고본의 일부입니다. 그 중 ‘전근대’ 부분에 대한 내용만 홉스봄이 해제를 달아 간행했던 것이지요. 홉스봄은, 《역사론》(강성호 역, 민음사) 11장 〈마르크스와 역사학〉(1983)에서 다름과 같이 말합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역사적 설명의 토대(basis)이지, 역사적 설명 자체가 아니다.”(262) “마르크스는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경제환원주의자의 정반대 편에 서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264) “질문은 왜 이러한 진화가 균등하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특히 불균등하고 상호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마지막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말을 한 것이다.”(271)

지금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가능성의 중심》이 제 가방에 있습니다. 당분간 천천히 읽을 생각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학에서 변증법을 떼어내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보는 것, 그의 관점에 나는 동의합니다. 변증법이 결국 현실을 합리화한다는 그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역사는 변증법이건 뭐건, 논리적 전개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칙이 아닌 이야기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학 ‘연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기 위해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 마르크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최고의 고전, 《자본》! 역사학이 실천적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문제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면, 그 문제 현실에 대한 학습은 《자본》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마침 경향신문에 동아대 강신준 교수가  《자본》을 지상 강의 하길래 전화를 드려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테리 이글턴이라는 사람이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황정아 옮김, 길, 2012년 9월의 따끈한 번역입니다.)를 쓴 책이 나왔다고 신문에 나왔길래 주문했습니다. 이번 겨울방학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으려고 합니다. 함께 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