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신라 외위제의 성립과정」(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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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6세기 신라 외위제의 성립과정」
(2012. 2. 동국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이성호(고대사분과)

 


‘나의 학위논문’이라는 주제의 글을 부탁받고 어떻게 소개를 해야할 지, 그리고 소개를 하기에 자신이 있는 글인지 라는 고민이 생겼다.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반년가량이 지나갔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다시 읽어보면서 부족한 점만 눈에 띄고 크게 내세우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또 부족한 글이라는 생각만이 남아 소개하는 글을 쓰기에 앞서 부끄럽고 민망하게 생각된다.

  한국고대사 전공자로 대학원에 들어온 이후 신라, 특히 6세기의 정치사를 관심을 갖고 공부하였다. 관련 사료들을 뒤지고, 다양한 주제의 연구사를 정리하던 중 영일냉수리신라비보다도 더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금석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발견에 대한 것으로 포항에서 진행된 한국고대사학회 세미나에 참석하여 여러 선생님들의 판독 및 초기 연구들을 보게 되었다.


<그림 1> 중성리비 심포지엄 포스터

특히 중성리비에서 주목하게 된 것은 중앙의 6부에서 일벌(壹伐)이라는 명칭이 나온 것으로 이전까지 외위로만 생각되어 왔던 것이 6부에서 나왔다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일벌이라는 관등을 중심으로 율령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와 주변 소국 복속의 방식, 그리고 외위제(外位制)가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금석문을 다시 검토하고 문헌자료를 살펴보며, 다른 연구 성과들을 다시금 검토하는 작업을 진행해 보았다. 이 과정 중 처음 정리된 글을 발표할 기회를 얻어 학회에 발표하기도 했지만, 부족함을 많이 느낀 상태로 다시 정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나아가 주변의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글을 정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다시 읽어보면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글이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학위논문의 제목은 「6세기 신라 외위제의 성립과정」이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외위제가 성립하는 과정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료검토가 선행되어야 했다. 당대의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금석문이며, 금석문을 통해 제도의 성립을 검토해야 했기에 금석문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를 진행하였다. 먼저 501년과 503년의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서는 소속을 중심으로 인명을 기재하는 방식이 존재하였으며, 그 소속은 훼(喙)‧사훼(沙喙)/4부/지방의 세 집단으로 구분이 되고 있음을 보았다. 더욱이 두 금석문 상에서 훼‧사훼는 아간지(阿干支)등의

분화된 관등명이 보이며, 4부에서는 간지(干支)-일벌의 관등만이 보였다. 지방에서는 간지-일금지(壹金知)라는 관등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도 중앙과 지방의 관등의 구분이 어느 정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속을 중심으로 인명을 기재한다는 점에서 부 혹은 소속을 중시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경위제(京位制)가 성립한 이후의 왕-일벌간(一伐干) 체제와 4부에서 보이는 간지-일벌의 체제가 유사하다는 점은 훼‧사훼를 포함한 6부의 관등제 원형이 간지-일벌체제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더욱이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통해서 간지-일벌체제가 6부서 시행된 초기 관등체제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훼‧사훼의 관등제는 6부에서 시행되던 간지-일벌체제가 왕권의 강화에 의해 분화되어 중성리비, 냉수리비의 아간지등의 형태로 분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방에서는 중앙의 간지-일벌에 대비되는 간지-일금지체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법흥왕대인 520년의 율령반포가 있었지만 아직 경위‧외위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봉평비를 기점으로 금석문의 인명기재방식이 소속 중심에서 관등 중심으로 기재하는 것으로 바뀌고 본파부(本彼部)‧잠훼부(岑喙部)의 간지들이 훼‧사훼의 관등 소지자보다 앞에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율령의 반포에 따른 4부의 관등소지자들에게 경위가 적용되는 과정에서 경위적용의 위계조정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봉평비에서는 율령의 반포에 따라 4부에 경위제가 도입이 되고는 있지만 기존의 체제와 혼재하는 형태로 나타나 미비함이 보여진다고 이해하였다.


<그림 2> 울진봉평신라비 탁본(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러한 현상은 지방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봉평비에 외위 관등과 함께 일금지가 기록되고 있어 옛 제도와 새로 도입되는 외위제가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도입되는 외위제는 간지예하에 일벌/일척/피일/아척이라는 관등명이 도입되는 것으로 6부의 일벌이하 관등을 기초로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경위․외위제가 도입되는 과정이 나타난 것이 봉평비 단계로 이 시기를 외위제 성립의 과도기로 칭하고자 한다.

이후 늦어도 550년경에는 6부에서 경위제가 성립되고, 지방에서는 훼‧사훼의 관등체제가 전화하여 성립한 비간지군의 외위제가 성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 등을 통한 전쟁의 유공자 등의 새로운 지방세력의 등장에 대한 처우를 위해 외위의 간군이 상향분화하여 악간/술간/고간/귀간/선간/상간/간의 형태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도가 성립하게 된 것은 신라 특유의 국가성립의 방식이 소국의 지배층을 중앙으로 이주시켜 지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중앙으로의 집중은 결국 중앙에 속하는 것이 지방에 거주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방에 대한 중앙의 우월성이 소속에 따른 관등의 부여라는 제도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라의 지배방식이 신라의 관등제가 소속을 중심으로 구분되는 경위‧외위제로 성립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을 대략 소개하였다. 논문의 목표는 새로 출현한 자료들, 그리고 당대에 가장 가까운 자료들을 중심으로 신라의 관등제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되 그 중 외위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특히 중앙과 지방이라는 지역적인 기준으로 차등적인 관등을 수여한다는 것이 율령의 반포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러한 양식이 존재하였는지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에도 그렇고 시간을 두고 다시금 검토하면서 느껴지는 것이지만 문헌사료를 비롯한 사료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을 다시금 통감하였다. 율령이전의 시기에 대한 문헌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금석문을 중심으로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아직도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논문을 통해서 6세기 신라 외위제의 성립과정을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공부를 하면서 더 많은 사료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연구를 진행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