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對)서진(西晉) 교섭과 국제정세」(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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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3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對)서진(西晉) 교섭과 국제정세」
(2012.2 동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이승호(고대사분과)

  석사 2학기를 마치고 맞는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구입한 『집안현문물지(集安縣文物志)』(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3)를 읽다가 비로소 처음 「진고구려솔선읍장(晉高句麗率善邑長)」인ㆍ「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인ㆍ「진고구려솔선천장(晉高句麗率善仟長)」인 등 고구려 인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진 않고 있다가 석사 4학기가 끝나갈 무렵 뚜렷한 학위논문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답답한 마음에 헌책방을 배회하던 중 우연히 『진한남북조관인징존(秦韓南北朝官印徵存)』(羅福頤, 文物出版社, 1987)이란 인보(印譜)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진솔선한백장(晉率善韓佰長)」인ㆍ「진솔선맥백장(晉率善佰長)」인ㆍ「진부여솔선백장(晉夫餘率善佰長)」인ㆍ「진고구려솔선읍장(晉高句麗率善邑長)」인ㆍ「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인ㆍ「진고구려솔선천장(晉高句麗率善仟長)」인 등 고대 한국 관련 인장들의 인문(印文)이 다수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그 자료를 보면서 마치 심마니가 귀한 약초를 발견한 마냥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학위 논문의 주제를 「3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對)서진(西晉) 교섭과 국제정세」로 설정하였지만 사실 처음부터 고구려와 서진(西晉)과의 관계를 주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 인장 자료들을 활용하여 논문을 써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 조금씩 글의 방향이 갖추어지면서 최종적으로 서진과 고구려의 관계로까지 논의가 확장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처음의 욕심에 비해 논문의 내용은 부실하고 약점 또한 많이 노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욕심이란 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그림 1> 『진한남북조관인징존』에 실린 한국 고대 인장 인문(印文)


현재 실물로 전하는 고구려 관련 인장은 총 3종으로 「진고구려솔선읍장(晉高句麗率善邑長)」인(중국 故宮博物院 소장)ㆍ「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인(중국 歷史博物館 소장)ㆍ「진고구려솔선천장(晉高句麗率善仟長)」인(중국 天津藝術博物館 소장)이 있다. 여기에 인문(印文)으로만 전하는 것들을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직 전론으로 다루어진 바가 없다. 이들 인장 자료는 정확한 출토지와 공반 유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료 자체에 대한 분석에 한계가 있다. 또한 3세기 후반 고구려와 서진의 관계 속이서 이들 자료를 이해하려 하여도 관련 문헌사료의 부재로 인하여 뚜렷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이들 인장 자료를 분석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료적 한계를 직시하면서 동아시아 인장 체계의 현황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들 인장과 고구려와 서진의 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글의 기본 방향도 「진고구려솔선(晉高句麗率善)」 동인(銅印)의 자료적 성격을 먼저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3세기 말 고구려의 서진과의 외교가 진행된 배경과 그 교섭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먼저 「진고구려솔선」 동인의 사료적 성격 파악이 관건이었다. 하지만 인장 자료의 구체적 정보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인장과 함께 출토된 공반 유물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여기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따라서 해당 인장을 받은 인물의 사회적 위치나 그 시기를 추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유물의 성립 시기를 알기 위해 일단 서진과 고구려의 외교 관계가 수립된 시기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진서(晉書)』 무제기(武帝紀)에 보이는 동이(東夷) 교섭 기사와 평주(平州) 동이교위(東夷校尉) 설치 기사를 주목하여 양국의 외교적 교섭은 서진의 평주 설치가 마무리될 무렵(276)에 이루어진 것으로 일단은 추정해 보았다.

「진고구려솔선」 동인 중 출토지역이 알려진 것은 「진고구려솔선읍장」인과 「진고구려솔선백장」인 단 2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출토 지역이 모두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집안(集安) 지역 일대였다. 그리고 서진이 외이(外夷)에게 사여한 인장 체계를 기준으로 볼 때, 이들 인장의 국제적 등급은 「국왕(國王)」인장과 「귀의왕후(歸義王侯)」인장에 다음가는 3등급 「솔선(率善)」인장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진(魏晉) 시대 구축된 외이에 대한 중국의 인장 체계 속에서 고구려에서 3등급 「솔선(率善)」인장만 발견된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문헌 사료에서는 늦어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시대에 이르면 고구려왕은 중국 측에 의해 ‘왕(王)’의 지위를 인정받았음을 전한다. 또한 현전하는 인장자료를 통해 보면 서진 시기 중국은 주변 세력에게 「국왕(國王)」인장 – 「귀의왕(歸義王)ㆍ후(侯)」인장 – 「솔선(率善)」인장의 체계를 유지하며 각 국 왕에게 「국왕」인장 또는 「귀의왕」인장을 사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서진측에게 「진고구려솔선」 동인을 받은 대상이 고구려왕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진고구려솔선」 동인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이 인장을 받은 인물은 누구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인장의 사여 체계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였다. 먼저 당시 고구려의 대외교섭체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책구루(幘溝漊) 관련 기사에 주목하였다. 책구루의 설치로 인해 고구려의 대외교섭권이 고구려 왕권에 귀속되었다는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3세기 당시 고구려의 대외교섭권은 고구려 왕권에 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진과 고구려의 교섭을 고구려 왕권과 서진 측의 직접적인 외교 교섭으로 파악하였고, 양국의 관계의 정립 속에서 고구려 왕에 대한 책봉이 전제된 「솔선」인장의 사여 과정을 상정하였다. 나아가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한(韓)ㆍ왜(倭)와 위나라의 교섭기사에 대한 검토를 통해 「솔선」 인장의 사여가 주로 조위(曹魏)와의 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던 동이의 관료층에게 주어졌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논문에서는 「진고구려솔선」 동인이고구려왕을 대신해 서진 측과 외교적 교섭을 담당하였던 고구려측 관료에게 주어졌던 인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마지막으로 3세기 말 진행된 고구려의 대(對)서진 외교의 배경과 그 추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살펴본 바 3세기 말 모용선비의 세력 확장에 따라 서진의 동이교위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모용선비의 성장을 견제하였던 정황을 포착하였다. 특히 286년 고구려는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일시 몰락한 부여의 유민을 북옥저 지역에 안치ㆍ보호하였으며, 이후 동이교위 하감의 주도로 이루어진 부여의 복국 과정에도 개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3세기 후반 고구려는 서쪽 변경을 위협하는 모용선비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서진과 외교적 교섭을 맺고 긴밀한 군사적ㆍ외교적 관계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진고구려솔선읍장」 인장ㆍ「진고구려솔선백장」 인장ㆍ「진고구려솔선천장」 인장 등의 동인(銅印) 유물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립된 자료로 파악하였다.

이상 학위논문 대략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추후 연구 보완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 부분에서 견해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우선은 서진과 고구려의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변군이 아닌 동이교위를 주목하였던 것이 현재로서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 점은 앞으로 서진 시대 변방 이민족통어관의 운용과 변군의 운용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이해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다음으로 인장을 사여 받은 대상을 『삼국지』 왜인전을 사례를 통해 서진과 외교를 담당한 고구려측 관료라 판단한 기존 논지를 수정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인장을 받은 대상을 외교 담당 관료에 한정하지 않고 당시 고구려 주요 지배층의 존재 양태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로 인장 사여 대상의 범위를 보다 확대해보고자 한다. 또한 당시 중국에게 인장을 사여 받은 중국 주변 세력의 사례를 분석하여 인장 사여 대상에 대한 다양한 사례 분석을 시도하여 논증에 참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 전개하였던 당시 서진과 고구려, 그리고 모용선비와 부여 이 4국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도 보충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너무 섣부르게 단정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의 자세에서 보다 깊은 고민을 통해 당시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