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1948년 북한의 상업정책과 소비조합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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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1945~1948년 북한의 상업정책과 소비조합의 활동」
(2012.2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이주호(현대사분과)

 

  ‘나의 학위논문’이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받았을 때, 그것이 무척 ‘민망한’ 작업이 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렵고도 길었던 자료 독해, 내 문장력의 한계를 체감하는 시간이었던 초고 작성, 그리고 선생님·선배·동료들과의 지속적인 소통과 무수한 수정을 거쳐 논문을 완성하기까지의 고통이 상기되었다. 그렇지만 학위논문 제출을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 현 시점에서 이를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석사 논문을 위한 연구 주제 선택 과정은 단순한 ‘흥미’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석사 과정 입학 당시만 해도 해방공간의 좌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북관계에 대한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곧 38선 이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연구 주제로 해방 이후 북한 경제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단순한 이유였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의 정국을 주도한 사회주의자들도 자신의 이념 지향과 별도로 현실 토대에 맞추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당대의 역사상이 보다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소비조합을 연구 소재로 선택한 것은 이러한 ‘어렴풋한’ 문제의식 설정의 결과였다. 소비조합은 1946년에 창설되어 경제기구로 운용되다가 1958년 농업협동화 완료와 더불어 농업협동조합에 통합되어 사라진 조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비조합은 단순한 협동조합운동의 한 갈래가 아니다. 일찍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조합을 두고 협동경리의 장점(우월성)을 인민에게 체득하게 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이끌어낼 조직이라는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북한의 역사서술 역시 1947년부터 ‘사회주의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견지에서 소비조합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필자는 소비조합의 존재와 활동을 평가함에 있어 그것이 과연 사회주의 지향을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정로』, 『로동신문』, 『근로자』, 『인민』, 『소비조합』 등의 정기간행물을 일일이 읽으면서 관련된 사실들을 찾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어리석게도, 필자는 초반에 ‘소비조합’이라는 단어만을 쫓으면서 자료를 읽었다. 해방 이후 북한사에서 소비조합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당시 북한의 경제정책과 새로운 경제체제 구축 과정을 보아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다소 긴 시간의 ‘좌충우돌’을 경험한 뒤였다. 이를 통해 차차 자료 독해의 폭을 소비조합에서 생필품 유통과 상업 전반, 그리고 상업정책까지, 더 나아가 북한의 경제정책 전반에 두게 되었다.

논문 진척 과정에서 또 하나의 돌파구가 된 것은 식민지기·미군정기에 대한 공부였다. 필자는 처음부터 북한경제사를 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 조선경제의 상을 제대로 잡고 있어야한다는 주위의 지적을 수차례 받았다. 그러한 조언에 따라 식민지 말기 전시 조선의 경제 상황과 조선총독부의 경제 정책,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한 공통의 물적 조건 속에서 남한의 미군정은 어떠한 정책들을 펼쳤는지를 북한의 경험과 비교해서 보고자 노력하였다. 북한 자료를 읽다가 특정 사건이나 문제가 나올 때, 식민지 말기와 미군정기에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는지를 꼭 찾아보곤 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해방 이후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식민지 말기의 전시체제하 통제 경제 운영을 먼저 시야에 두어야 했다. 조선총독부가 생필품 유통을 포함한 상업 부문에 대하여 통제를 가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남과 북에는 경제 운영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일본의 파행적인 전시 경제 운영으로 조선 경제는 극도의 빈곤·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통제 경제 정책의 경험이 일정 부분 유지·계승되고 있었다.

그러나 남과 북은 구체적인 정책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38선 이남의 미군정은 미곡유통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와 가격 제한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정책을 실시한다. 북한에서도 1946년 전반기까지 부분적으로 가격 통제 정책이 실시되는 한편 조선식량영단과 같은 전시 기구가 유지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곧 북한의 경제정책은 조선총독부·미군정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5월 소비조합의 조직이었다.

소비조합은 각 지역에서 반(半)자생적으로 조직된 시·군 단위 조합을 기초로 한다. 기층에서 사회단체로 등장한 소비조합은 조합원들을 모집하고 기금을 모아 상거래를 시작하였다. 우선 소비조합은 시·군-도-중앙으로 이어지는 전국 규모의 새로운 물류체계 창출이라는 적극적인 성격을 갖는다. 해방 직후부터 1946년 전반기까지 평양의 곡가 상승에 비하여 함흥의 곡가 상승세가 거의 2배에 다다랐던 사실은 양곡을 비롯한 생필품 유통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지만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지역간 물류를 제도적으로 촉진시킬 필요가 있었다. 1946년 하반기부터 실시된 소비조합의 양곡수매사업은 조직의 일개 사업이 아니라 당국이 주도하는 식량정책의 하나였다.

그러나 인민들에게 소비조합의 이용이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 등장한 소비조합론은 ‘모리간상배’와 같은 투기욕이 배제되어 있는 소비조합의 특성상, 상업 부문에서 가격과 유통 구조 상의 ‘왜곡’을 줄일 수 있다는 협동조합이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다만 소비조합 조직과 더불어 국영상업이 창설된 것은 북한이 소비조합·국영상업·민간상업의 공존 구도를 설정하는 소련식 경제체제와 상업정책을 수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은 개인상공업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되, 소비조합과 국영상업이 상품유통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3월에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 상업정책이 토의 주제로 올랐을 때, 북한지도부는 소비조합과 국영상업이 민간상업을 압도해야 하는 원칙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질타하였다.


<그림 1> 북한 소비조합 중앙대회 모습

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전쟁 이전까지 북한 사회가 당국의 정책에 의하여 얼마나 변화했는지의 여부이다. 소비조합을 선두로 새로운 상품 유통구조를 확립하고자 했던 북한지도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자료들에서, 필자는 정반대로 전쟁 이전까지 북한 사회에서 개인상공업자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모습 등을 통해, 국가의 정책이 ‘아직 허공에 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업부문에서 소비조합과 국영상업 중심의 유통 구조가 곧 개인들의 자유로운 상거래 행위에 장애물로 작동한다는 ‘혐의’는 아직 ‘가능성’에 불과했다.

정리하면, 1946년에 조직된 소비조합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원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통제 경제와 다른 방식으로 당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소비조합 중심의 상업정책 실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이후 북한에 소련식 경제 시스템이 수용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북한사 전개의 역사적 의미는 해방 전후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남한과의 비교사적 접근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다. 남과 북은 식민지 유산이 남긴 공통의 물적 조건에서 출발하였지만, 각각의 정치적 환경을 반영한 정책을 선택·실행하게 됨에 따라 남과 북의 역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필자는 추후 연구를 통해 북한 체제의 역사적 기원을 20세기 한국근현대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작업에 동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