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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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
(2012. 2.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박준형(고대사분과)

 

  학위논문을 제출한 지 반년 가까이 지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학위논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런 심정에서 학위논문을 소개하려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학위논문에서는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검토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고조선의 위치 변화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고조선의 고고문화와 문헌기록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동의 과정에서 고조선이 어떠한 발전 과정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검토를 하려고 했다. 즉, 고조선의 중심지 변화에 따른 단계별 발전 과정을 밝히는 것이 학위논문의 목적이었다.

주지하듯이 고조선사 연구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시공간적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먼저 시간적 범위는 『관자(管子)』에 고조선이 처음 언급되는 점에서기원전 7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기원전 108년 멸망하는 시점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단군신화의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중국인이 남긴 문헌에 등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공간적 범위에 대해서는 대체로 요령설, 평양설, 이동설로 나뉜다. 이처럼 견해가 상반되는 이유는 초기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후기 고조선의 위치를 통해서 역으로 초기의 위치를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사료의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그 위치와 강역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고조선의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성립·발전된 정치체라는 기본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 지역집단을 아우르면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은 청동기를 독점적으로 생산·사용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청동기문화의 발전과 고조선의 정치적 성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라고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고조선이 이 문화를 통해서 성장했다면 그 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관련하여 비파형동검문화의 범위는 비파형동검, 선형동부, 다뉴기하문경 등이 공반되는 지역으로 대릉하유역~서북한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화의 주체를 예맥족으로 보았다. 부여와 고구려가 예와 맥, 즉 예맥족에서 성장한 정치체였던 것처럼 고조선도 바로 예맥족에서 성장한 정치체로 보았다.

전기비파형동검문화가 가장 발달된 지역은 대릉하유역의 십이대영자유형이다. 이중에서 최고 수장층의 무덤에만 부장되는 다뉴기하문동경이 가장 밀집되어 나타나고 청동기의 수량과 기종면에서 가장 풍부한 사례가 집중되는 조양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지역과 주변과의 사이에서 일방적인 교류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양지역에는 주변을 압도할 만한 정치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고조선을 조양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소국 정도의 규모로 대릉하유역의 대표적인 세력집단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림 1> 십이대영자유형의 청동기

후기비파형동검문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대릉하유역은 중원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비파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상실, 즉 中原化된다. 이에 비해 요동지역은 정가와자유형을 중심으로 전기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하면서 중원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정가와자유형을 상위로 하는 교류체계가 형성되면서 좀더 단일한 문화양상으로 통합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후기비파형동검문화의 중심은 더 이상 대릉하유역이 아니라 심양 정가와자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요북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국책』이나 『위략』에 보이는 기원전 4세기 단계의 고조선은 요북의 심양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2> 심양 정가와자 6512호묘(이후석 제공)

기존의 고고학적 연구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중심의 이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릉하유역에서는 석곽(관)묘를 계속해서 조영하는 반면에, 요동지역은 토광묘를 지배집단의 묘제로 채택하면서 비파형동검문화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필자는 이것을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자체적인 발전과정으로 보았다. 정가와자유형이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기와 달리 주체적인 수용과 자체적인 발전과정을 통해 비파형동검문화의 중심으로 부상(浮上)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문화의 중심이 바뀌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예맥사회에서 고조선이라고 불리는 실체가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요동지역의 고조선이 연의 침공에 의해 지배집단이 평양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요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성장에 따른 문화 중심의 이동인 반면에 후자는 외부의 침입에 의한 지배집단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후반 고조선은 연과의 대립과정에서 칭왕(稱王)을 하게 된다. 왕호가 보이고 대부(大夫)라는 관직이 보인다는 점에서 이미 국가의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은 주변의 진번·임둔과 같은 소국들과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고조선은 이 연맹체의 힘을 바탕으로 연과 대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기원전 282년경 고조선은 연의 공격으로 평양지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과 연의 경인 만번한(滿番汗)은 오늘날 천산산맥 이서지역인 개주(蓋州)일대로 보았다. 이로써 천산산맥 이서지역에는 요동군이 설치되면서 연문화(燕文化)가 이식되었다. 반면에 천산산맥 이동지역에서는 연문화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지만 여전히 초기세형동검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한교체기 한은 내란과 흉노와의 고전 속에서 고조선을 비롯한 남월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이 틈을 노려 고조선은 요동지역을 공격하여 한과 경계를 패수(浿水)로 삼았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한서(漢書)』를 개사(改寫)한 후한대 『전한기(前漢紀)』를 보면 고조선이 한과 요수(遼水=小遼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즉, 패수가 당시 (소)요수인 혼하(渾河)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한기』에는 위만이 “무리 천여 인을 모아 遼[遼東]에 있었으며 秦의 故地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위만은 패수=혼하를 건너 요동의 진고공지에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의 왕권을 장악한 위만은 한과 외신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위만은 외신의 대가로 제공받은 병위재물을 통해 진번, 임둔 등 주변 연맹세력을 복속하여 광역의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고조선은 상을 대표로 하는 재지세력들과 유이민을 주축으로 하는 왕권이 결합하여 중앙의 권력구조를 이루었다. 상이 속한 집단은 왕권에 의해 일정한 통제를 받았으나 대부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조선은 복속지역의 토착사회를 해체하지 않고 그 지역 최고 수장의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활용하였다.

고조선은 독립성이 강한 여러 지역집단을 느슨하게 묶은 累層的인 지배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언제든지 지배집단의 이탈이 가능한 불안한 구조였다. 예군남려의 이탈은 위만조선의 지배구조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한은 내정이 안정되자 흉노와 남월을 공격하여 군현으로 편제하였다. 이어서 한은 외신의 의무 불이행이란 명분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고조선의 성장 요인으로 작용했던 외신관계가 무제대에 이르러서는 침략의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이 필자의 학위논문의 대강이다. 논문의 목표는 고조선의 이동 과정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고조선이 어떻게 성장, 발전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지만 두 가지를 유기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같다. 문헌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였지만 그것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다시 문헌상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다만 이동설의 입장에서 고조선의 발전과정을 새롭게 정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논문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할 따름이다.